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문단 편집) === 대반란, 1173~74년 === [[헨리 2세]]는 일찍이 차남 [[청년왕 헨리]]를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및 앙주 백작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리처드에게는 아키텐을 상속하고, 사남 [[제프리 2세|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를, 막내 [[존 왕|존]]은 성직자의 길을 걷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들들에게 통치권을 양도하는 것을 미루었고 청년왕 헨리의 상속지에 속했던 성 3개를 일언반구 상의없이 막내 아들 존에게 물려주기로 한 결정 또한 청년왕 헨리의 불만을 키웠다. 게다가 정무로 바빴던 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소홀했고, 리처드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애정이 깊지 않았고 업신여기는 태도가 드러났다. 1173년, 부왕으로부터 하루빨리 독립적인 권한을 얻어내고 싶었던 17세의 리처드와 형 헨리, 동생 [[제프리 2세|제프리]]는 남편과 깊은 불화를 겪고 있던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주도로 그녀의 전남편인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원조를 받기로 하여 파리에 집결하고 대반란을 모의했다. 이때 리처드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연히 형제들과 함께 9살이 된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 2세|필리프]]를 만나게 되었고, 눈여겨볼 만한 점은 리처드가 루이 7세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리처드와 형제들은 루이 7세의 동의 없이는 부왕 헨리 2세와 평화를 이루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헨리 2세는 우선 아들들과 협상을 벌여 두둑한 보상으로 달래려 했으나 루이 7세는 그들이 거절하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는 전쟁의 규모를 거대하게 확장시켰고 종국에 부자지간에 결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감정적 골을 남기게 했다. 1173년 여름, 동맹군은 노르망디를 침공하고 이것이 훗날 사자심왕의 첫 전투였다. 동맹군에는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불로뉴 백작 마티외를 비롯한 수많은 권력가들이 가세했다. 나중에 아들들과 합류하려던 엘레오노르는 도중에 헨리 2세의 계략에 걸려 체포되고 장장 10년이 넘는 연금 생활에 처하게 되었다. 리처드는 사랑하는 모후의 체포 소식을 듣고는 당장 라로셀로 진군했지만 도시의 격렬한 반항에 부딪혀 승전보를 울리지 못하는 반면, 헨리 2세는 동맹군을 완전히 압도하여 불로뉴 백작은 전사, 루이 7세는 패배하여 도주하는 신세에 이르었다. 1174년 봄, 동맹군의 수익이 지지부진해지고 패색이 짙어진 상황을 판단한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만 챙겨서 헨리 2세와 협상을 열었고, 리처드는 이 배신에 격분하여 마지막까지 분투했지만 철저한 고립에 처했다. 1174년 9월 23일, 궁지에 몰린 리처드는 결국 부왕의 발 밑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눈물로 대성통곡하며 용서를 빌었고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도 뒤따라 눈물로 부왕에게 용서를 비는 것으로 마침내 대반란은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